120513물리학과_철학은_어울릴_수_있는가-NYT23.pdf
뉴욕타임즈
사설
2012. 05. 10
물리학과 철학은 어울릴 수 있는가?
개리 거팅 씀
스톤은 동시대 철학자들의 시사적인 주제나 불변하는 주제에 대해 논하기 위한 공간이다.
물리학자들은 최근 철학자들을 힘든 시기로 몰아넣어왔다. 스티븐 호킹은 작년 한 연설에서 철학자들이 과학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왔기 때문에 철학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더 최근에는 로렌스 크라우스가 저서인 “무(無)로부터의 우주: 왜 무(無)가 아닌 유(有)인가?”에서 “철학과 신학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우리 존재에 대한 정말 근본적인 질문들을 혼자 힘으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과학 철학자인 데이비드 알버트는 크라우스의 저서를 다음과 같이 폄하했다. “내가 보기에 ‘우주가 무(無)에서 출발했을 지도 모른다는 크라우스의 이 주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크라우스가 완전히 틀렸으며 그의 종교적, 철학적 비평가들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것이다.” 알버트의 이론 물리학 박사 학위를 고려하지 않은 크라우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알버트를 “바보 같은 철학자”라고 받아 쳤다. (크라우스는 최근에 쓴 과학적 미국인 기사에서 입장을 다소 누그러트리고 있다.)
크라우스의 실수: 과학 실험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 진리 결정 요인”이라는 믿음
필자는 토론 수준을 약간 높일 수 있을지 알아보려 한다. 다소 불쾌한 언사를 했지만 크라우스는 철학자들이 “근본적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데 공헌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에서 인용한 “혼자 힘으로”라는 그의 말은 일반적인 자질이다.) 그리고 확실히 알버트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그들의 학문에 필수적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물리학자와 철학자 모두의 감각을 통합하는 생각 한 줄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전체로서의 물질 (물리적) 우주에 연관성이 없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신의 존재를 옹호해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주는 무(無)에서 기원해야겠지만, 물질이 무(無)에서 발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한 가지 대응으로서 우주는 항상 존재해왔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발생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대 우주론으로 충분히 정립된 빅뱅 이론은 흔히 이런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한다.)
크라우스는 이런 종류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그 주장의 효력이 “무(無)”의 의미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주론적 맥락에서 “무(無)”의 의미는 과학이 그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바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무(無)”에 대한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과학적 의미는 “빈 공간”이다. 즉, 기초적인 분자가 없는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 따르면 분자는 빈 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주(즉, 모든 기초 분자와 그에 따라 이들이 형성하는 것들)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분자가 빈 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빈 공간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분자가 없을 때조차 비어있는 공간에 물성(物性)을 줄 수 있는 불안정한 가상 구역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역은 “임의적” 분자 생산을 허용하는 법칙들로 지배된다. 알버트는 가상 구역이 분자가 발생하는 “어떤 물질”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수긍하지만 양자 역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묶는 오랜 기간 탐구된 중력 양자 이론이 단순히 그 이론 법칙의 속성 상 빈 공간 그 자체의 자발적 생산을 허용할 진일보한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無)에서 발생한 공간과 구역, 분자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알버트는 물리 법칙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물리 법칙들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데 그들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인내심을 발휘하는 크라우스에 따르면 “다원 우주”를 그럴 듯 하게 제시하는 또 다른 유망한 이론적 접근법이 있다. 즉, 고유한 자연 법칙을 갖는 자기 수용적, 비(非)상호적 우주들이 무한하게 속할 수 있는 집합체를 말한다. 사실 다원 우주는 당연히 가능한 모든 법칙 집합을 갖는 우주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속한 특정 우주 때문에 기능하는 법칙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물론 알버트는 다원 우주 그 자체가 더 높은 수준의 법칙으로 지배된다고 대응할 수 있다.
알버트는 어디에서나 자연 법칙이 존재하며, 이 법칙은 항상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어떤 물리적인 “것” (분자, 구역 등) 에 적용된다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유(有)는 사실 무(無)에서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필자에게 이것은 알버트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진 경우처럼 보인다. “무(無)”라는 의미 쓰임에는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절대적인 쓰임이 있다. 어떤 면에서 크라우스는 단지 고집스럽게 이런 사용법을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크라우스가 철학을 좀 더 안다면, 이런 절대적인 쓰임과 그에 따라 존재가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원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많은 철학자들의 언급을 쉽게 인용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펼치는 주장에 대한 훌륭한 조사로서 로이 소렌슨의 스탠포드 백과사전 기사인 “무(無)”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가해성에 대한 많은 철학적 비판을 넘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존재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는 데 대한 강한 반대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은각각의 존재는 단순히 발생하지 않음, 즉 존재의 발생에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주의 발생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주가 발생했다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흄과 그의 동조자들은 우주의 원인에 대한 문제를 실증 과학에 맡겨두는 데 전적으로 만족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존재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명제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철학에 호소할 수 있지만, 과학 실험을 그의 표현으로 세상에 대한 “궁극적 진리 결정 요인”이라고 단순히 가정함으로써 철학적 비판에 직면한다. 과학의 성공으로 인해 수준 높은 진리 탐색을 위한 실험적 방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는 세상에 대한 모든 진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과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지 경험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들만 다루기 때문에 인지 경험으로 전혀 알 수는 없는 어떤 존재, 예를 들면, 의식이나 도덕, 미(美), 신 같은 것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인지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적 실험이 아닌 철학적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의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점에 대해 당연히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이 없으면 그의 주장은 지식이 아닌 신뢰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개리 거팅은 노트르담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노트르담 철학 평론의 편집자이다. 그는 최근작인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생각: 1960년 이후 프랑스 철학”의 저자이며, 스톤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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