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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5일
진정한 혁신
존 거트너
“혁신은 항상 미국을 정의해온 용어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의 연두교서에서 말했다. 반대하기 힘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혁신적인 미국 회사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처럼 말이다. 그리고 불경기 앞에서도 실리콘 밸리에 있는 불굴의 기업인들은 세상을 바꿀만한 작지 않은 야심을 갖고 우후죽순으로 신생 기업을 일으켜왔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미국의 혁신 문화를 너무 크게 이상화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독창적인 디지털 기업들이 창의성을 위해 우리가 생각해봄 직한 최적의 환경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필자가 이런 회의에 이르게 된 이유는 과거 미국의 독점 전화 회사였던 AT&T의 예전 연구 개발 기관인 벨 연구소에서의 혁신 과정을 5년 동안 보았기 때문이다.
왜 벨 연구소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벨 연구소는 우리 나라의 기술 회사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오랜 혁신적 우위가 실제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한 많은 교훈을 준다. 하지만 벨 연구소는 또한 오늘날 혁신에 대해 접근하는 일반적인 방식보다 더 포괄적이고 야심 찬 방법을 제시한다. 연구원들은 복잡한 국가적 통신망에 필요한 점진적 발전 방안에 대해 연구했고 그와 동시에 상상 가능한 가장 혁명적인 발명을 위해 훨씬 앞서서 생각했다.
실제로 기후 변화처럼 난해해 보이는 문제들을 처리할 혁신적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벨 연구소의 예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벨 연구소는 아폴로 프로그램을 규모나 범위, 비용 면에서 맨하탄 프로젝트와 대등하게 하려고 했다. 아폴로 프로그램의 목적과 엄청난 성공은 우리 모두를, 그리고 우리의 새 기계를 다 같이 연결하는 것이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의 향후 주주들에게 보내는 최근의 편지에서 회사의 사훈 중 하나가 “빨리 움직이고 깨트리자”라고 말했다. 벨 연구소의 사훈은 오히려 “사려 깊게 움직이고 건설하자”였을 지도 모른다. 이런 사훈은 계산자를 가지고 다녔으며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들의 옛 가치에 대한 이상한 추종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벨 연구소가 이룩한 성과를 생각해보자. 20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벨 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과학 기구였다. 벨 연구소의 전체 발명 목록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마 1947년에 발명한 트랜지스터일 것이다. 이것은 이제 모든 디지털 제품과 동시대 삶의 기반이다. 이 작은 기기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일은 전기 신호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작은 전기 발화로 트랜지스터는 켜졌다 꺼졌다 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비트”라는 정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이 정보는 숫자 1이나 0으로 표시된다. 요즘에는 우리의 전화기나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칩들에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다.
벨 연구소는 다른 놀라운 발명품들도 만들어냈다. 모든 태양열원 기기의 효시인 실리콘 태양 전지가 그 곳에서 고안되었다. 벨 연구소 연구원 두 명이 레이저에 대한 최초 특허를 냈고, 동료들이 많은 초기 시제품을 만들었다. (모든 DVD 플레이어에는 벨 연구소에서 발명한 종류와 유사한 쌀 한 톨 정도 크기의 레이저가 있다.)
벨 연구소는 최초의 통신 위성을 고안 및 개발했고, 디지털 통신을 이론화하고 개발했으며, 최초의 핸드폰 시스템을 만들었다. 전하결합소자, 즉 CCD로 알려진 기기가 그 곳에서 만들어졌으며 이제 그것은 디지털 사진 기술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벨 연구소는 또한 최초의 광섬유 케이블 시스템을 구축했고 차례로 기가 바이트의 정보가 전세계를 묶을 수 있게 하는 발명을 했다. 벨 연구소는 프로그래밍 분야에도 능숙했다. 연구소의 컴퓨터 학자들은 유닉스와 C 언어를 개발했다. 이 두 가지는 오늘날 가장 필수적인 운영 체제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용 기술 몇 개일 뿐이다. 벨 연구소의 어떤 연구원들은 물리학과 화학, 천문학, 수학의 경계를 엄청나게 넓혔던 논문을 집필했다. 연구소의 기타 공학자들은 모기업 벨 사의 산업체 공장을 위해 특별한 (새로운 제품이라기 보다) 새로운 과정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사실, 제조업 제품의 고품질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요즘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통계 분석 방식인 “품질 통제”는 벨 연구소의 수학자들이 처음 적용했다.
그러면 뉴저지 소재 벨 연구소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일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일개 과학자와 공학자 단체가 어찌 그렇게 놀라운 신기술들과 창의적인 생각들을 내놓았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지금 현재라고 부르게 된 미래를 창조했다. 게다가 그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언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가?
벨 연구소의 창의적 문화에 기여한 일등공신은 머빈 켈리였다. 아마 켈리 씨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미주리 시골 지역의 넉넉치 못한 가정에 태어나서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도로 교육을 받은 그는 AT&T 사의 연구소로 입사했다. 1925년과 1959년 사이에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켈리 씨는 연구원에서부터 이사회 회장까지 승진했다. 1950년에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의 연구소가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 강연했다.
켈리 씨는 기본적으로 그의 연구소와 같은 “창의적인 기술 연구소”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인 “비판적인 집단”이 생각을 바쁘게 주고 받도록 장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혁신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켈리 씨는 물리적인 인접성이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즉, 전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었다. 벨 연구소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이론학자들과 기술 전문가들을 한 지붕 아래 수용했다. 트랜지스터 프로젝트를 함께 연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섞인 사람들은 물리학자와 금속공학자, 전기공학자들이었다. 이론과 실험, 제조 전문가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 유능한 콘서트 홀 지휘자처럼 켈리 씨는 과학적 주제들 사이, 연구자와 개발자 사이, 개인과 그룹 사이에 조화나 때로는 긴장을 유발했다.
켈리 씨의 접근법 중 한 가지는 설계였다. 그는 1941년 뉴저지 머레이 힐에 완공된 건물의 설계를 개인적으로 도왔는데 그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그 건물의 복도 중 몇 개는 아주 길어서 그 끝을 보면 소실점으로 사라질 정도로 설계되었다. 그 기나긴 복도를 수많은 지인과 문제들, 주의를 돌릴 만한 것이나 생각들과 마주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인 물리학자 한 명은 산적한 철 조각들 옆을 굴러가는 자석과 같았다.
또 다른 접근법은 성취욕이었다. 벨 연구소는 때때로 상아탑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더 적절한 묘사는 공장으로 내려가는 상아탑이다.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이나 공학자들에게 그들 기관의 궁극적 목표가 새로운 지식을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점은 명확했다.
에너지 부 장관인 스티븐 추는 1980년대 초 벨 연구소에서 한 연구로 1997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벨 연구소 같은 응용 과학 환경에서 연구하면 “천재의 핵심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벨 연구소에서는 순수 과학 연구를 추구하는 연구원들에게도 자신들의 연구가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은 확실했다.
한편 켈리 씨가 추진하곤 했던 또 다른 방법은 조직화였다. 그는 벨 연구소의 위성 시설을 모 전화사의 여러 제조 공장에 설치했다. 이로써 앞서 언급한 모든 새로운 생각들을 물건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교류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공학자들도 공장 근로자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제조업은 갈수록 미국 밖으로 빠져나갔으므로 제조업과 함께 산업 지식에 대한 전체 생태계도 마찬가지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지식이 벨 연구소가 새로운 혁신을 추진할 수 있게 하곤 했다.
켈리 씨는 특히 연구에 있어서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켈리 씨가 책임자였을 때 몇몇 과학자들은 자치권이 대단히 커서 켈리 씨는 그들의 연구 성과를 대체로 연구를 허가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예를 들어, 트랜지스터의 전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연구진을 결성했을 때, 2년 이상이 흘러서야 발명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켈리 씨가 트랜지스터의 대량 생산 문제를 처리할 또 다른 팀을 결성했을 때는 그 과제를 공학자 한 명에게 주면서 계획안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 동안 켈리 씨 자신은 유럽에 가겠다고 했다.
요컨대 켈리 씨는 사람들이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의 창조를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켈리 씨에게 벨 연구소는 많은 과학적인 모범, 즉 이런 선구자들이 사실상 주제에 대해 정의하는 책을 썼기 때문에 흔히 일컬어지는 “그 책을 쓴 사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구자들을 일상 속에 섞여 들어가게 할 필요도 있었다. 칸막이 사무실이 나타나기 전 시대에 벨 연구소의 전 직원은 사무실 문을 열어 놓고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 연구소에서의 새로운 채용은 으레 연구 책임자가 주도했고 그 책을 쓴 사람을 찾곤 했다. 클로드 섀넌 같은 유명학 수학자나 윌리엄 쇼클리 같은 전설적인 물리학자에 대해 질문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어떤 젊은 연구원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하지만 벨 연구소의 정책은 그런 연구원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머빈 켈리 씨의 혁신 전략에 필요한 또 다른 요소가 있었는데 다른 요인들과 똑같이 중요하거나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켈리 씨는 빨리 말하고 빨리 걸었고, 계단을 뛰어 오르내렸다. 하지만 연구원들에게는 자유뿐만 아니라 시간을 주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몇 해에 해당하는 많은 시간은 필수적이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오늘날 같이 더 빠르고 경쟁적인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누군가는 벨 연구소가 오늘날의 기술 회사들과 달리 독점적인 지위로 보장되는 기댈 만한 큰 수익을 내는 모 회사를 위해 일하는 여유를 가졌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누구도 분기 별 수익을 올리기 위해 기준치를 맞추거나 경쟁사에 앞서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은 사실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어떤 정의에 따르면, 혁신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사회와 경제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면서 (켈리 씨가 일전에 말했듯이) “더 좋거나 더 저렴하게, 아니면 둘 다” 기능할 수 있는 중요한 신제품이나 새로운 과정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요즘 혁신이라는 단어를 거의 아무 데나 사용한다. 그 단어는 스마트 폰 앱이나 소셜 매체 접근 도구를 설명할 수 있다. 트랜지스터나 핸드폰 시스템을 위한 청사진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거대하다. 한 종류의 혁신은 약간의 일자리와 수익을 창출한다. 켈리 씨와 동료들이 벨 연구소에서 반복적으로 추구했던 또 다른 종류의 혁신은 수백만 개의 일자리와 사회의 부와 복지를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만든다.
이렇게 다른 종류의 혁신을 합쳐 말함으로써 우리는 혁신적인 소비자 제품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이익 추구 기업가들이 혁신적인 선임자들만큼 효과적이라고 믿게 되는 것 같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생각은 지지 받지 못한다. 벨 연구소에서 레이저와 트랜지스터, 태양 전지를 발명했던 팀들은 수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해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신제품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수익성이 큰 산업 군을 창출했다.
혁신을 위한 단일한 최고의 방법은 없다. 실리콘 밸리가 보여준 여러 가지 방법들은 수십 년 동안 우리 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거대 독점 기업들이 있던 시대로 돌아가는 일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통신 산업이 번영하고 있고, 고객들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다양한 저렴한 기기들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은 예전 전화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었어도 AT&T는 신제품과 서비스 소개가 느렸으며, 거의 저렴하지도 않았다. 그에 대해 타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이보다 더 보수적인 회사는 거의 없지만, 더 창조적인 회사는 아예 없다.”
하지만 벨 연구소의 유산을 생각해보면 기술적 도약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작은 기술적 단계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것은 또한 페이스북이 명백히 실천하고 있듯이 항상 “빨리 움직이고 깨트”린다든지 (구글이 설명했던 회사 철학인) 끊임없는 “속도 예찬” 추구가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최선책도 아닐 것이다. 혁명은 빨리 일어나지만 서서히 시작된다. 우리는 반 세기도 넘는 옛 시절에 감수했던 위험과 투자했던 연구의 덕을 아직도 크게 보고 있다.
존 거트너는 출간 예정인 “생각 공장: 벨 연구소와 미국의 위대한 혁신 시대”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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