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사설
2012. 5. 6.
실행자와 이론가
제이슨 스탠리
스톤은 동시대 철학자들이 시사적인 주제나 불변하는 주제, 모두에 대해 논하기 위한 공간이다.
태그: 지식, 철학
우리 사회는 이론 지식과 실행 능력 사이에 놓인 가상의 분리 선에 기반한 계층으로 나뉜다. 대학 교수는 텔레비전에서 지루하게 떠들고, 배관 기술자는 뜬구름 잡는 상아탑 지식인들에 대해 화를 낸다. 대학 교수와 배관 기술자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우리들 각자의 지성에 대한 사고 방식으로 반영된다. 인간은 이론가이자 실행자이다. 이런 활동들이 개별적인 능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은 자연스레 들기 마련이다. 생각할 때는 세상의 진실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행동할 때는 다양한 행동 방식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이 분리된 인식 능력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즉, 실행 지식과 이론 지식은 다르다. 대학 교수의 세계는 아마 배관 기술자의 세계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 능력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는 지식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진실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체득하지” 못한다. 배관 기술자는 정치 체계와 경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 복잡한 행동 능력은 그런 지식에 대한 실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일을 못하는 박식한 교수 유형은 우매한 청년 유형만큼 친숙하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 자전거 타기, 점프 슛 하기, 아기 돌보기, 리조또 요리 같은 활동을 실행 지식을 이행하는 것으로 즉각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수학 명제 증명, 물리학 가설 검증, 철학 논거 정립하기를 진리에 대한 지식 운용 능력을 이행하는 것으로 구분 지으려 한다. 이론적 사고에 능한 만큼 실용적인 일은 못하는 박식한 교수 유형은 우매한 청년 유형만큼 많이 쓰이는 대중문화 소재이다. 실행 기술은 지적 지식의 양상이 아니라는 일반적 생각은 현대 철학에서도 공고히 자리잡고 있다. 전례를 찾자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이분법이 제시하는 모형에 따르면, 이론 지식의 이행은 연이은 지식의 행동으로 이끄는 해당 이론 가설이나 규칙과 관련된 능동적인 사고를 수반한다. 체스 선수가 체스의 첫 수(手)에 대해 배운 지시사항에 따르는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대조적으로 실행 지식은 심사숙고 없이 자동적으로 이행된다. 능숙한 테니스 선수는 공을 받아 치기 전에, 지침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선수는 공을 받아 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자동적으로 실행한다. 또한 이론 지식의 이행이 가설이나 규칙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이행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침과 관련 있다는 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즉, 이론 지식을 이행하는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할 지침서를 갖고 있다. 반대로 테니스 기술을 구성하는 일부 요령은 어떤 지침서로도 대비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대응과 관련 있다. 능숙한 테니스 선수가 잘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지침서를 따르는 일과 무관해 보이는 행동인 새로운 서브에 대해 경기를 조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활동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는 적성이 진리에 대한 지식 습득에 대한 적성과 다르다는 생각은 타인과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상호작용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 아이가 신체 활동에 재능을 보이면서 수학에 대한 흥미가 초반에 부족하다면, 아이가 실용적 활동에는 적성이 있으나 지적 추구에는 적성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행자들과 이론가들 사이에 있음직한 구분 선을 일단 그으려고 하기 시작하면 틈이 나타난다. 운동 기술을 익히는 사람은 어떤 것을 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그러나 과학 가설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때도 학습의 일례이다. (모두는 아니라도) 세계의 많은 언어에서 같은 동사가 이론 지식뿐 아니라 실행 지식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영어로 “know”는 불어로 “savoir”이다.) 더 중요한 점으로 지식에 대한 어떠한 실행에 대해 생각해보더라도, 실용적이든 이론적이든 간에 솔직히 말해서 실행 능력과 지적 능력을 둘 다 사용해야 하는 특성을 갖는 듯 보인다. 수학자의 명제에 대한 증명은 이론 지식의 실행에 대한 이상적인 예이다. 그러나 수학에서 능숙하게 계산하기 위한 수학자의 훈련은 테니스 선수의 훈련처럼 수학자가 수학적 현실을 탐험할 때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어려움에 대응하는 데 능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이행하는 일에는 능동적 사고도 필요 없다. 필자는 버튼을 눌러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킨다는 지식을 일말의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이행한다. 다른 면을 보면, 단순히 실행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많은 예가 명백히 이론적인 방식으로 습득된다. 사람들은 요리책의 조리법을 읽으면서 리조또 요리법을 배울 수 있고 종종 그렇게 하니 말이다.
아마 실행 지식을 이론 지식과 구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때는 말로 그 지식을 표현할 수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배울 때는 이 지식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아기를 웃게 하는 방법을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표현하지는 못할 수 있다. 반면 워싱턴이 미국 수도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이 지식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를 구분한다고 해서 실행 지식과 이론 지식 사이에 어떤 임의적 구분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필자는 암호가 415XH라는 점을 알아도 이 지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수 있다. 단지 번호판이 주어질 때 번호 키를 누를 수 있을 지 모른다. (그 지식은 그러니까 필자의 손가락에 있는 셈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하는 점이 이론 지식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실행 방법을 알고 있는 누구든지 그 지식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기를 웃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그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결국 “이게 아기를 웃게 하는 방법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 아기를 웃기는 동안에 말이다.
필자는 여기서 (다른 곳에서는 더 길게) 실행 지식과 진리에 대한 지식 사이에서 임의적인 구분을 무턱대고 지으려 한다면 실패한다는 점을 논했다. 배관 기술자나 전기 기사의 활동은 과학자나 역사가의 최신 기사들과 같은 종류의 지능에 대한 표현이다. 즉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 역학에는 능숙한 반면 철학에는 무능할 수 있다는 점은 맞다. 하지만 이론 물리학에 능하지만 철학에 무능한 사람도 있다는 점 또한 맞다. 능숙하고 능숙하지 않은 것 사이 구분은 실행적이거나 이론적인 성향 사이에 대한 일반적인 구분과 관련이 없다. 학생 대출을 합리적으로 받아내기만 위해서라면 우리는 또한 많고도 아마 더 복잡한 사실을 익혀야 하는 전문적인 직업과 더 쉽게 잘할 수 있는 직업 간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병렬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실행적이거나 이론적인 성향 사이에 대한 일반적인 구분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연장선 상에 있는 구별이다.
우리 사회에는 실용적인 일과 이론적 사고 사이에 잘못된 이분법으로 세워진 장애물들이 있다. 누군가 자동차 수리에 대한 재능을 일찍 개발한다면 자신이 문학비평이나 명제 입증에는 소질이 없을 거라고 잘못 가정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로부터 기회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문학비평이나 수학에 대해 잠재적으로 중요한 공로자를 빼앗는 셈이다. 사회의 보상 체계 또한 이론적 성격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따르는 희생과 비용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앞선 상황을 가정 한다. 가상의 구분은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기능한다. 자동차 수리에 시간을 쓰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경제 “전문가들”의 주장을 평가할 만한 적절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토론으로부터 이질감을 느껴서 자신의 소외감이 선전 요원들의 분노에 찬 수사법으로 반영되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실행자와 이론가 사이 구분은 사회를 여러 갈래로 고착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 구분은 소외시키고 분열시킨다. 그러면 그것이 단지 소설이라는 점은 다행스럽다.
제이슨 스탠리는 루트거 대학의 철학과 교수이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한 세 권의 저서, “지식과 실행 이익”, “상황 언어”, “요령”의 저자이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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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ator
MAY 6, 2012, 5:00 PM
The Practical and the Theoretical
The Stone is a forum for contemporary philosophers on issues both timely and timeless.
Tags: knowledge, Philosophy
120614ThePracticalNTheoretical-NYT.docx
Our society is divided into castes based upon a supposed division between theoretical knowledge and practical skill. The college professor holds forth on television, as the plumber fumes about detached ivory tower intellectuals. The felt distinction between the college professor and the plumber is reflected in how we think about our own minds. Humans are thinkers, and humans are doers. There is a natural temptation to view these activities as requiring distinct capacities. When we reflect, we are guided by our knowledge of truths about the world. By contrast, when we act, we are guided by our knowledge of how to perform various actions. If these are distinct cognitive capacities, then knowing how to do something is not knowledge of a fact — that is,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and theoretical knowledge. The world of the college professor is supposedly so different than the world of the plumber because they are viewed as employing fundamentally different mental capacities in their daily lives. The college professor doesn’t “get it,” because her knowledge is purely theoretical, knowledge of truths. The plumber isn’t qualified to reason about a political system or the economy because skill in complex action is not an exercise of such knowledge.
The cliché of the learned professor inept in practical tasks is just as familiar as that of the dumb jock.
Most of us are inclined immediately to classify activities like repairing a car, riding a bicycle, hitting a jump shot, taking care of a baby or cooking a risotto as exercises of practical knowledge. And we are inclined to classify proving a theorem in algebra, testing a hypothesis in physics and constructing an argument in philosophy as exercises of the capacity to operate with knowledge of truths. The cliché of the learned professor, as inept in practical tasks as he is skilled in theoretical reasoning, is just as much a leitmotif of popular culture as that of the dumb jock. The folk idea that skill at action is not a manifestation of intellectual knowledge is also entrenched in contemporary philosophy, though it has antecedents dating back to the ancients.
According to the model suggested by this supposed dichotomy, exercises of theoretical knowledge involve active reflection, engagement with the propositions or rules of the theory in question that guides the subsequent exercise of the knowledge. Think of the chess player following an instruction she has learned for an opening move in chess. In contrast, practical knowledge is exercised automatically and without reflection. The skilled tennis player does not reflect on instructions before returning a volley — she exercises her knowledge of how to return a volley automatically. Additionally, the fact that exercises of theoretical knowledge are guided by propositions or rules seems to entail that they involve instructions that are universally applicable — the person acting on theoretical knowledge has an instruction booklet, which she reflects upon before acting. In contrast, part of the skill that constitutes skill at tennis involves reacting to situations for which no instruction manual can prepare you. The skilled tennis player is skilled in part because she knows how to adjust her game to a novel serve, behavior that does not seem consistent with following a rule book.
The thought that aptitude at acquiring skills at practical activities is different from aptitude at acquiring knowledge of truths affects our most fundamental interactions with others. When our child exhibits skill at a physical activity, and and an initial lack of interest in mathematics, we might suppose that the child has aptitude for practical activities but not intellectual pursuits (and vice versa).
But once one begins to bear down upon the supposed distinction between the practical and the theoretical, cracks appear. When one acquires a practical skill, one learns how to do something. But when one acquires knowledge of a scientific proposition, that too is an instance of learning. In many (though not all) of the world’s languages, the same verb is used for practical as well as theoretical knowledge (for example, “know” in English, “savoir” in French). More important, when one reflects upon any exercise of knowledge, whether practical or theoretical, it appears to have the characteristics that would naïvely be ascribed to the exercise of both practical and intellectual capacities. A mathematician’s proof of a theorem is the ideal example of the exercise of theoretical knowledge. Yet in order to count as skilled at math, the mathematician’s training — like that of the tennis player — must render her adept in reacting to novel difficulties she may encounter in navigating mathematical reality. Nor does exercising one’s knowledge of truths require active reflection. I routinely exercise my knowledge that one operates an elevator by depressing a button, without giving the slightest thought to the matter. From the other direction, stock examples of supposedly merely practical knowledge are acquired in apparently theoretical ways. People can and often do learn how to cook a risotto by reading recipes in cookbooks.
Perhaps one way to distinguish practical knowledge and theoretical knowledge is by talking. When we acquire knowledge of how to do something, we may not be able to express our knowledge in words. But when we acquire knowledge of a truth, we are able to express this knowledge in words. Somebody may know how to make a baby laugh but not be able to express how they do it. But if someone knows that Washington is the capital of the United States, they are presumably able to express this knowledge in words.
However, the distinction between what we are able to express in words and what we are unable to so express does not track any supposed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and theoretical knowledge. I may know that the secret password is 415XH, but I may not be able to express this knowledge in words — I may only be able to press the keys when given a keypad (the knowledge resides, so to speak, in my fingers). One might then think that being able to express something in words is not necessary for theoretical knowledge. Conversely, one may think that anyone who knows how to do something is able to express that knowledge in words. After all, someone who knows how to make a baby laugh can, when asked how to do it, say, “This is the way to make a baby laugh,” while he makes a baby laugh.
I have argued here (and at length elsewhere) that once one bears down on the supposed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knowledge and knowledge of truths, it breaks down. The plumber’s or electrician’s activities are a manifestation of the same kind of intelligence as the scientist’s or historian’s latest articles — knowledge of truths. It is true that someone might be adept at car mechanics and hopeless at philosophy. But it is also true that someone might be adept at theoretical physics and hopeless at philosophy. Distinctions between what one is adept at and what one is not adept at do not correlate with the folk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and theoretical pursuits. If only to appropriate student loans rationally, we must also recognize distinctions between professions, the mastery of which requires learning many and perhaps more complex truths, and professions that one can master more easily. But these are distinctions along a continuum, rather than distinctions in kind, as the folk distinction between practical and theoretical pursuits is intended to be.
There are barriers in our society erected by a false dichotomy between practical work and theoretical reflection. If someone develops early on a skill at repairing cars, she may falsely assume that she will not be adept at literary analysis or theorem proving. This robs not only her of opportunities but also society of a potentially important contributor to literary analysis or mathematics. The reward structure of society also assumes it, reflected in both the pay and the cost of pursuing what are thought of as the theoretical pursuits. The supposed distinction also operates on an everyday level. If one spends one’s time repairing cars, one may think that one does not have the appropriate capacities to evaluate the arguments of economic “experts” on television. One might then feel alienated from such discussions and find one’s sense of alienation reflected in the angry rhetoric of propagandist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ractical and the theoretical is used to warehouse society into groups. It alienates and divides. It is fortunate, then, that it is nothing more than a fiction.
Jason Stanley is professor of philosophy at Rutgers University. He is the author of three books for Oxford University Press, “Knowledge and Practical Interests,” “Language in Context” and “Know How.” More work can be found at his Web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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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13물리학과_철학은_어울릴_수_있는가-NYT23.pdf
뉴욕타임즈
사설
2012. 05. 10
물리학과 철학은 어울릴 수 있는가?
개리 거팅 씀
스톤은 동시대 철학자들의 시사적인 주제나 불변하는 주제에 대해 논하기 위한 공간이다.
물리학자들은 최근 철학자들을 힘든 시기로 몰아넣어왔다. 스티븐 호킹은 작년 한 연설에서 철학자들이 과학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왔기 때문에 철학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더 최근에는 로렌스 크라우스가 저서인 “무(無)로부터의 우주: 왜 무(無)가 아닌 유(有)인가?”에서 “철학과 신학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우리 존재에 대한 정말 근본적인 질문들을 혼자 힘으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과학 철학자인 데이비드 알버트는 크라우스의 저서를 다음과 같이 폄하했다. “내가 보기에 ‘우주가 무(無)에서 출발했을 지도 모른다는 크라우스의 이 주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크라우스가 완전히 틀렸으며 그의 종교적, 철학적 비평가들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것이다.” 알버트의 이론 물리학 박사 학위를 고려하지 않은 크라우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알버트를 “바보 같은 철학자”라고 받아 쳤다. (크라우스는 최근에 쓴 과학적 미국인 기사에서 입장을 다소 누그러트리고 있다.)
크라우스의 실수: 과학 실험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 진리 결정 요인”이라는 믿음
필자는 토론 수준을 약간 높일 수 있을지 알아보려 한다. 다소 불쾌한 언사를 했지만 크라우스는 철학자들이 “근본적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데 공헌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에서 인용한 “혼자 힘으로”라는 그의 말은 일반적인 자질이다.) 그리고 확실히 알버트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그들의 학문에 필수적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물리학자와 철학자 모두의 감각을 통합하는 생각 한 줄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전체로서의 물질 (물리적) 우주에 연관성이 없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신의 존재를 옹호해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주는 무(無)에서 기원해야겠지만, 물질이 무(無)에서 발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한 가지 대응으로서 우주는 항상 존재해왔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발생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대 우주론으로 충분히 정립된 빅뱅 이론은 흔히 이런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한다.)
크라우스는 이런 종류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그 주장의 효력이 “무(無)”의 의미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주론적 맥락에서 “무(無)”의 의미는 과학이 그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바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무(無)”에 대한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과학적 의미는 “빈 공간”이다. 즉, 기초적인 분자가 없는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 따르면 분자는 빈 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주(즉, 모든 기초 분자와 그에 따라 이들이 형성하는 것들)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분자가 빈 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빈 공간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분자가 없을 때조차 비어있는 공간에 물성(物性)을 줄 수 있는 불안정한 가상 구역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역은 “임의적” 분자 생산을 허용하는 법칙들로 지배된다. 알버트는 가상 구역이 분자가 발생하는 “어떤 물질”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수긍하지만 양자 역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묶는 오랜 기간 탐구된 중력 양자 이론이 단순히 그 이론 법칙의 속성 상 빈 공간 그 자체의 자발적 생산을 허용할 진일보한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無)에서 발생한 공간과 구역, 분자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알버트는 물리 법칙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물리 법칙들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데 그들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인내심을 발휘하는 크라우스에 따르면 “다원 우주”를 그럴 듯 하게 제시하는 또 다른 유망한 이론적 접근법이 있다. 즉, 고유한 자연 법칙을 갖는 자기 수용적, 비(非)상호적 우주들이 무한하게 속할 수 있는 집합체를 말한다. 사실 다원 우주는 당연히 가능한 모든 법칙 집합을 갖는 우주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속한 특정 우주 때문에 기능하는 법칙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물론 알버트는 다원 우주 그 자체가 더 높은 수준의 법칙으로 지배된다고 대응할 수 있다.
알버트는 어디에서나 자연 법칙이 존재하며, 이 법칙은 항상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어떤 물리적인 “것” (분자, 구역 등) 에 적용된다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유(有)는 사실 무(無)에서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필자에게 이것은 알버트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진 경우처럼 보인다. “무(無)”라는 의미 쓰임에는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절대적인 쓰임이 있다. 어떤 면에서 크라우스는 단지 고집스럽게 이런 사용법을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크라우스가 철학을 좀 더 안다면, 이런 절대적인 쓰임과 그에 따라 존재가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원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많은 철학자들의 언급을 쉽게 인용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펼치는 주장에 대한 훌륭한 조사로서 로이 소렌슨의 스탠포드 백과사전 기사인 “무(無)”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가해성에 대한 많은 철학적 비판을 넘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존재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는 데 대한 강한 반대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은각각의 존재는 단순히 발생하지 않음, 즉 존재의 발생에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주의 발생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주가 발생했다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흄과 그의 동조자들은 우주의 원인에 대한 문제를 실증 과학에 맡겨두는 데 전적으로 만족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존재는 무(無)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명제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철학에 호소할 수 있지만, 과학 실험을 그의 표현으로 세상에 대한 “궁극적 진리 결정 요인”이라고 단순히 가정함으로써 철학적 비판에 직면한다. 과학의 성공으로 인해 수준 높은 진리 탐색을 위한 실험적 방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는 세상에 대한 모든 진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과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지 경험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들만 다루기 때문에 인지 경험으로 전혀 알 수는 없는 어떤 존재, 예를 들면, 의식이나 도덕, 미(美), 신 같은 것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인지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적 실험이 아닌 철학적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크라우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의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점에 대해 당연히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이 없으면 그의 주장은 지식이 아닌 신뢰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개리 거팅은 노트르담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노트르담 철학 평론의 편집자이다. 그는 최근작인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생각: 1960년 이후 프랑스 철학”의 저자이며, 스톤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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